2020/21년 록다운의 겨울

독일 정부가 코로나 방역과 백신 접종 시도에 족족 실패하는 동안 겨울이 다녀갔다. 이번 겨울은 유독 눈이 많이 내렸는데 창가에서 하얗게 변신하는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곤 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동안은 새도 울지 않고, 자전거 탄 사람도 없고, 산책하는 가족도 없으며, 오로지 맞은 편 집 테라스에 나와 눈구경하는 노인들밖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Continue reading 2020/21년 록다운의 겨울

2020년과 2021년 사이

2020년 여름, 장보러 가는 길에 김강과 나 . 전염병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자연스럽게 설명하기 어려운 한 해였다. 이전처럼 우연을 기대하며 미지근하게 살다가는 코로나에 감염되기 전에 어쩌면 미라가 되어 발견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만나려면 연락을 먼저 하거나 연락이 와야 했다. 그래서 결국 만나면 어색한 몇 미터 거리를 두고 상투적인 안부를 주고받았다. 친구가 최근 누구와… Continue reading 2020년과 2021년 사이

X의 정체

이번 학기에 청강하는 과목들은 전반적으로 정체성(Identität)에 관한 세미나가 많은데, 강의명만 나열해봐도 이렇다. 정체성과 건축(Identität und Architektur), 정체화와 정체성(Identifikation und Identität), 젠더와 다양성(Gender und Diversity). 마치 이 혹독한 겨울학기가 지나고 비로소 봄이 오면 '그래서 자네는 정체성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는 똑 소리 나게 대답할 줄 아는 대학생이어야 할 것만 같다.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와중에도 다들 처음에는… Continue reading X의 정체

줄넘기

2018년 봄 나는 우리의 연애가 단체 줄넘기와 닮았다고 종종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의 몸이 달라서, 다른 세대라서, 다른 전공에 몰두하고 있어서, 다른 목소리를 내서, 다른 영혼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이유로 물러선 만큼 길어진 줄넘기와 텅 빈 운동장이 자꾸만 떠오른다. 한산한 운동장에 널찍하게 서서 붕붕 돌리기 시작한 단체 줄넘기. 그 사이로 고양이 두 마리가 유연하게 넘나들기도, 예쁜… Continue reading 줄넘기

1-5번 무한루프 속에서

지난주 일요일 밤에는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다가, 한 남성이 홀로 "자유(Freiheit)"를 애타게 외치는 모습을 보았다. 그에게는 자유가 마치 잃어버린 강아지 같은 것인 듯, 골목 하나하나 포기하지 않고 목이 쉬도록 불러제꼈다. 게다가 그의 손에는 기다란 각목이 야무지게 들려 있었는데, 그 투박한 나무토막 끝에 기름불이 아슬아슬 사선으로 일렁이는 게, 정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처량하고 또 그래서 위험해… Continue reading 1-5번 무한루프 속에서

진공청소기와 거미집

화병을 잃어버린 이후로는 집에 생화를 두고 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게 작년이었나. 이 블로그에 '화병의 꽃이 시들고 줄기가 썩어가는 섭리를 지켜보는 게 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라던가 하는 적당한 글을 썼던 것 같은데 사실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보다 이번에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거미가 계속 눈에 걸렸다. 화병이 있던 화장실 천장에는 초대형 거미가 종종 진을 쳤는데… Continue reading 진공청소기와 거미집

그녀의 근황

  냉장고 한쪽에 아기 고양이용 우유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거 깻잎이가 먹던 건데 어떡하지? 하고 몇 번이나 우리 손에 들렸다가, 다시 냉장고로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우유 팩. 그걸 마시던 깻잎이가 떠나고 두 달이 지났다. 깻잎이가 숨쉬기를 멈추고 나서도 우리는 한동안 깻잎이의 빈 껍데기에 대고 이름을 불렀는데 근육이 굳어도 털은 윤기가 반지르르하게 흘러서 자꾸자꾸 손이… Continue reading 그녀의 근황

간섭 없는 공원에서

 어쩌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얼굴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이번 봄은 공원에 들어설 때마다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하며 보냈다. 록다운으로 썰렁한 시내와는 대조적으로 템펠호프 공원은 살랑이는 바람에 강아지풀이 눕는, 그야말로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모두가 햇살을 즐기려 각자의 창문을 넘어 공원으로 쏟아졌는데, 피크닉을 즐기는 아이들은 공중에 연을 날렸고, 온몸이 타투인 커플도 롤러스케이트를 타다 넘어져도 즐거운 듯이 웃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나는… Continue reading 간섭 없는 공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