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도망치던 거 생각나

책장을 정리하다가 윤장섭 교수님의 <한국 건축사>를 발견했다. 대전대학교 다닐 적에 전공책이었는데 나에겐 그 시절을 대표하는 물건이라 독일에 넘어온 후에도 여러 번 이사했지만 늘 가지고 다녔다. 바래진 표지를 보고 있으니 십 년 전의 향수가 밀려와서 어느새 나는 선 채로 책을 펼쳐보고 있었다. 수업 중에 받아쓴 필기는 딱 1학기 분량만큼 의욕이 넘쳤다. 장을 넘길수록 흐지부지하더니 나중에는 읽는 것도… Continue reading 아까 도망치던 거 생각나

함께 태어난 어리석음에 대하여

'함께 태어난 어리석음'이라는 말이 몇 달째 머릿속에서 맴돈다. 처음부터 무시하려고 애썼으나 지금까지 계속 나를 따라오는 걸 보면 블로그에라도 써야 잊힐 것 같다. 딱히 무슨 의미인지는 나도 모르겠으니 그냥 잊을 수 있다면 잊고 싶은 심정이다. 동명의 제목을 가지고 글을 써보려 했으나 일기장에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번뇌가 줄줄이 튀어나왔다. 번뇌를 내보인 후에는 열심히 자기변호도 해야 하고, 그러다… Continue reading 함께 태어난 어리석음에 대하여

마리아를 겨눈 총구

경찰차 행렬이 그룬베어거 슈트라세 (Grünberger Straße)와 바샤우어 슈트라세 (Warschauer Straße)의 교차로로 꾸역꾸역 터져 나오는걸 목격한 건 1월 마지막 주의 어느 날이었다. 아스팔트가 비에 완전히 젖어 경찰차의 헤드라이트의 노란 불이 도로에 천천히 번졌다. 그 모습에 나뿐만 아니라 다른 행인들도 경찰이 통제하는 데모 행렬에 관심을 보였다. 경찰이 데모라도 하나 싶을 정도로 경찰차 수가 많았다. 데모의 진행 방향도… Continue reading 마리아를 겨눈 총구

Goodbye, Studio 318

사진 1.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 2017년 11월 Bild 1. Mein Lieblingsfoto im Studio 318, November 2017   과제와 설계 마감 그리고 전공시험 준비로 한 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늦은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학교의 리듬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어느새 2월이 온 줄도 몰랐다. 건축과 학생들은 어젯밤 다급히 떠올린 창, 벽, 계단의 존재를… Continue reading Goodbye, Studio 318

울적한 겨울엔 여러가지 의문이

우중충한 날은 몸을 전철에 내맡기고 흠뻑 젖은 베를린 시내를 내려다보는 것도 나름의 운치가 있다. 이날은 지하철을 탈까 하는 마음이 한편에 계속 있어서, 집 밖을 나서기 전 어떤 가방을 들어야 하나 망설였다. 그러다 끝내 나는 자전거 가방을 메고 못난이 자전거가 묶여있는 힌터호프로 내려갔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어도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기로 한 것이다. 일요일은 전철이 드문드문… Continue reading 울적한 겨울엔 여러가지 의문이

흑과 백

문학동네 100호 특별부록 <아뇨, 문학은 그런 것입니다>에 실린 권여선 작가님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사느냐 쓰느냐'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생각하고, 그렇다면 환골탈태하겠다고, 사는 걸 버리고 쓰는 걸 택하겠노라 결단할 뻔한 적도 있다. 결국 사는 걸 좋아해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지금도 어느 정도는 사는 일과 쓰는 일이 다정하게 양립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사는 동안은 쓰지 못하고 쓰는 동안은… Continue reading 흑과 백

2019년과 2020년 사이

2019년에는 단편소설 <베를린까지 320킬로미터>, <자매의 탄생>, <또라의 알고리즘에 대하여>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이후에 지금까지 두 편의 소설을 더 쓰고 있는데 쉽지 않다. (내년 여름에는 완성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올해 썼던 나의 첫 소설들이 앞으로 나에게 초심을 깨우쳐 줄 것 같아 기록해두려 한다. <베를린까지 320킬로미터>는 갑자기 찾아온 친구의 죽음을 겪은 나와 친구들을 위로하기 위해 썼다. 소설을… Continue reading 2019년과 2020년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