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배신

어제는 한 장편소설의 도입부를 읽다 몇몇 표현에 비위가 상해 견디질 못하고 그만 E-book 창을 닫아버렸다.  "그러니까 투덜거리며 뛰쳐나오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사정없이 뺨을 후려갈긴 뒤 다시 방안으로 집어넣은 것은 나로서는 너무나 정상적인 행동이었다. 내 행동이 조금 난폭했는지는 모르지만 문을 열고 뛰쳐나오다니!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그녀가 아닌가. 그녀가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을 줄 몰랐고,… Continue reading 환상의 배신

정말 문학은 그런 건가요?

문학동네 100호 특별부록 <아뇨, 문학은 그런 것입니다>를 읽고 생긴 물음이다. 부록의 제목은 다행히 출판사가 붙인 모양으로, 거창한 표지를 넘기면 '나에게 문학이란?' 이라는 거대한 물음에 답을 해야 했던 작가들의 투덜거림이 귀여웠다. 어떤 작가는 출판사에 대놓고 '나는 그런 거 모르오!' 혹은 '왜 그런 질문을 하시나요, 무례하시네요.' 라고 하는 것 같아서. 중견 작가부터 갓 등단한 신인까지, 100명의 서로 다른… Continue reading 정말 문학은 그런 건가요?

속초에서의 겨울_엘리자 수아 뒤사펭 (북레시피)

<속초에서의 겨울>을 읽는 것은 기억에 남는 재미있는 독서 경험이었다. 이야기는 프랑스인 혼혈로 태어났지만, 한 번도 프랑스 땅을 밟아보지 못한 여자가 속초로 취재 여행 온 프랑스인 중년 만화가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나는 특히 속초에서 나고 자라도 아버지를 닮은 외모 때문에 내부인으로도 외부인으로도 속하지 못했다는 소설 속 화자의 독백에 큰 이질감을 느꼈다. 핍진성이나 개연성이 부족해서 생기는 이질감이 아니라,… Continue reading 속초에서의 겨울_엘리자 수아 뒤사펭 (북레시피)

경애의 마음 _ 김금희 (문학동네)

다음에는 <조중균의 세계>를 읽어보려 한다. 우연히 <조중균의 세계>에 대한 해설을 양재훈 씨가 쓴 걸 발견했는데, <조중균의 세계>를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 해설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주 김금희 작가님의 단편소설 <경애의 마음>을 완독한 덕분이다.   "김금희의 소설에서는 낡은 것들이 함부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과거의 축적을 통해 형성된 현재의 질서를 정당화한다는 것이 아니다. 김금희의 소설 속에서도 현재의… Continue reading 경애의 마음 _ 김금희 (문학동네)

심보선 그리고 홍지호

시를 사는 사람이 없긴 없나 보다. 이 블로그 글을 쓰려고 두 편의 시를 구글링해보니 결제 없이 바로 볼 수 있다. 하긴, 나도 두 편중 하나는 우연히 리서치 중에 발견했으니 그들과 다르지 않으면서도. 이 좋은 시를 무료로 읽는다는 게 죄스러워 주변 분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심보선 시인의 <피할 수 없는 길>과 홍지호 시인의 <토요일>이 요새 마음 한구석에… Continue reading 심보선 그리고 홍지호

안나 씨의 몸과 정신

  속이 보이는 화병은 부지런한 사람들이나 관리할 수 있다는 걸 실감하는 중이다. 희한하게 어떤 꽃은 아직 시들지도 않았는데 줄기는 썩기 시작해서 하얀 곰팡이가 핀다. 화병이 불투명한 패턴으로 가리고 있다면 며칠은 외면할 수 있을 텐데. 이 화병은 투명해서 고인 물에 끈끈한 즙이 둥둥 떠다니는 부유물이 그대로 보이니 세면대에 쏟아 버릴 수밖에 없다. 비릿한 악취는 언제 맡아도… Continue reading 안나 씨의 몸과 정신

각자의 사정

  두 사람이 동시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난 3년을 동고동락하며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 내뱉은 "우리는 결국 다른 사람이야. 내가 너를 백 퍼센트 이해할 수는 없는 거야."라는 말이 야속해서 다른 한 사람은 눈물을 흘렸다.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각자 속으로는 복수의 칼날을 세우며, 다음 말을 고민했다. 하얗게 질린 입술이 얄밉게 움찔거린다. 그 두… Continue reading 각자의 사정

Willem de Rooij (빌렘 드 루이) – Whiteout

<I'm Coming Home in Forty Days> _  Jeroen de Rijke, Willem de Rooij, 1997   언젠가는 Whiteout을 맞이할 순간을 경험하게 될까? 아득히 깊은 얼음 위에 놓인 두 발을 내려다보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온 세상이 하얀 빛으로 가득찬 땅에 서게 될 기회가 올까. 그 광경에 넋을 놓고 보다가 마을로 돌아와 사우나를 하며 "오늘 우리 참 멋진… Continue reading Willem de Rooij (빌렘 드 루이) – White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