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쳐쓰기를 여러번

요즘 들어 집중하기가 어렵다.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작 써야 하는 글의 초점은 날아가고 어느새 다른 공상에 빠져있다. 어차피 판타지라면 조금 더 자유로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내 좁은 머리통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에 이제껏 살아온 맥락을 크게 벗어나기는 어렵다. 한참을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더럽게 재미없는 것 같다 결론 내고 생각하기를 중단했다. 나로부터 태어난 것을 부정하고 싶은 건 무슨 심보이며… Continue reading 고쳐쓰기를 여러번

프라우 리 (Frau Lee)

독일어를 배우느라 저질렀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나열해 보라고 하면 나는 밤도 지새울 수 있을 것만 같다. 지금의 허접한 독일어 실력을 갈고닦는 데 나 역시 무수한 오해와 오독을 거쳐왔기 때문이다. 글자 자체의 의미에 집중하니 상황을 오버해서 받아들이거나 - 반대로 가볍게 이해하여 뒤늦게 수습한다고 난처했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수많은 시행착오 중에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웃픈 에피소드를 하나 골라야… Continue reading 프라우 리 (Frau Lee)

환상의 배신

어제는 한 장편소설의 도입부를 읽다 몇몇 표현에 비위가 상해 견디질 못하고 그만 E-book 창을 닫아버렸다.  "그러니까 투덜거리며 뛰쳐나오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사정없이 뺨을 후려갈긴 뒤 다시 방안으로 집어넣은 것은 나로서는 너무나 정상적인 행동이었다. 내 행동이 조금 난폭했는지는 모르지만 문을 열고 뛰쳐나오다니!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그녀가 아닌가. 그녀가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을 줄 몰랐고,… Continue reading 환상의 배신

정말 문학은 그런 건가요?

문학동네 100호 특별부록 <아뇨, 문학은 그런 것입니다>를 읽고 생긴 물음이다. 부록의 제목은 다행히 출판사가 붙인 모양으로, 거창한 표지를 넘기면 '나에게 문학이란?' 이라는 거대한 물음에 답을 해야 했던 작가들의 투덜거림이 귀여웠다. 어떤 작가는 출판사에 대놓고 '나는 그런 거 모르오!' 혹은 '왜 그런 질문을 하시나요, 무례하시네요.' 라고 하는 것 같아서. 중견 작가부터 갓 등단한 신인까지, 100명의 서로 다른… Continue reading 정말 문학은 그런 건가요?

속초에서의 겨울_엘리자 수아 뒤사펭 (북레시피)

<속초에서의 겨울>을 읽는 것은 기억에 남는 재미있는 독서 경험이었다. 이야기는 프랑스인 혼혈로 태어났지만, 한 번도 프랑스 땅을 밟아보지 못한 여자가 속초로 취재 여행 온 프랑스인 중년 만화가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나는 특히 속초에서 나고 자라도 아버지를 닮은 외모 때문에 내부인으로도 외부인으로도 속하지 못했다는 소설 속 화자의 독백에 큰 이질감을 느꼈다. 핍진성이나 개연성이 부족해서 생기는 이질감이 아니라,… Continue reading 속초에서의 겨울_엘리자 수아 뒤사펭 (북레시피)

경애의 마음 _ 김금희 (문학동네)

다음에는 <조중균의 세계>를 읽어보려 한다. 우연히 <조중균의 세계>에 대한 해설을 양재훈 씨가 쓴 걸 발견했는데, <조중균의 세계>를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 해설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주 김금희 작가님의 단편소설 <경애의 마음>을 완독한 덕분이다.   "김금희의 소설에서는 낡은 것들이 함부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과거의 축적을 통해 형성된 현재의 질서를 정당화한다는 것이 아니다. 김금희의 소설 속에서도 현재의… Continue reading 경애의 마음 _ 김금희 (문학동네)

심보선 그리고 홍지호

시를 사는 사람이 없긴 없나 보다. 이 블로그 글을 쓰려고 두 편의 시를 구글링해보니 결제 없이 바로 볼 수 있다. 하긴, 나도 두 편중 하나는 우연히 리서치 중에 발견했으니 그들과 다르지 않으면서도. 이 좋은 시를 무료로 읽는다는 게 죄스러워 주변 분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심보선 시인의 <피할 수 없는 길>과 홍지호 시인의 <토요일>이 요새 마음 한구석에… Continue reading 심보선 그리고 홍지호

안나 씨의 몸과 정신

  속이 보이는 화병은 부지런한 사람들이나 관리할 수 있다는 걸 실감하는 중이다. 희한하게 어떤 꽃은 아직 시들지도 않았는데 줄기는 썩기 시작해서 하얀 곰팡이가 핀다. 화병이 불투명한 패턴으로 가리고 있다면 며칠은 외면할 수 있을 텐데. 이 화병은 투명해서 고인 물에 끈끈한 즙이 둥둥 떠다니는 부유물이 그대로 보이니 세면대에 쏟아 버릴 수밖에 없다. 비릿한 악취는 언제 맡아도… Continue reading 안나 씨의 몸과 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