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쳐쓰기를 여러번

요즘 들어 집중하기가 어렵다.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작 써야 하는 글의 초점은 날아가고 어느새 다른 공상에 빠져있다. 어차피 판타지라면 조금 더 자유로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내 좁은 머리통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에 이제껏 살아온 맥락을 크게 벗어나기는 어렵다. 한참을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더럽게 재미없는 것 같다 결론 내고 생각하기를 중단했다. 나로부터 태어난 것을 부정하고 싶은 건 무슨 심보이며… Continue reading 고쳐쓰기를 여러번

진공청소기와 거미집

화병을 잃어버린 이후로는 집에 생화를 두고 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게 작년이었나. 이 블로그에 '화병의 꽃이 시들고 줄기가 썩어가는 섭리를 지켜보는 게 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라던가 하는 적당한 글을 썼던 것 같은데 사실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보다 이번에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거미가 계속 눈에 걸렸다. 화병이 있던 화장실 천장에는 초대형 거미가 종종 진을 쳤는데… Continue reading 진공청소기와 거미집

프라우 리 (Frau Lee)

독일어를 배우느라 저질렀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나열해 보라고 하면 나는 밤도 지새울 수 있을 것만 같다. 지금의 허접한 독일어 실력을 갈고닦는 데 나 역시 무수한 오해와 오독을 거쳐왔기 때문이다. 글자 자체의 의미에 집중하니 상황을 오버해서 받아들이거나 - 반대로 가볍게 이해하여 뒤늦게 수습한다고 난처했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수많은 시행착오 중에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웃픈 에피소드를 하나 골라야… Continue reading 프라우 리 (Frau Lee)

그녀의 근황

  냉장고 한쪽에 아기 고양이용 우유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거 깻잎이가 먹던 건데 어떡하지? 하고 몇 번이나 우리 손에 들렸다가, 다시 냉장고로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우유 팩. 그걸 마시던 깻잎이가 떠나고 두 달이 지났다. 깻잎이가 숨쉬기를 멈추고 나서도 우리는 한동안 깻잎이의 빈 껍데기에 대고 이름을 불렀는데 근육이 굳어도 털은 윤기가 반지르르하게 흘러서 자꾸자꾸 손이… Continue reading 그녀의 근황

간섭 없는 공원에서

 어쩌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얼굴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이번 봄은 공원에 들어설 때마다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하며 보냈다. 록다운으로 썰렁한 시내와는 대조적으로 템펠호프 공원은 살랑이는 바람에 강아지풀이 눕는, 그야말로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모두가 햇살을 즐기려 각자의 창문을 넘어 공원으로 쏟아졌는데, 피크닉을 즐기는 아이들은 공중에 연을 날렸고, 온몸이 타투인 커플도 롤러스케이트를 타다 넘어져도 즐거운 듯이 웃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나는… Continue reading 간섭 없는 공원에서

환상의 배신

어제는 한 장편소설의 도입부를 읽다 몇몇 표현에 비위가 상해 견디질 못하고 그만 E-book 창을 닫아버렸다.  "그러니까 투덜거리며 뛰쳐나오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사정없이 뺨을 후려갈긴 뒤 다시 방안으로 집어넣은 것은 나로서는 너무나 정상적인 행동이었다. 내 행동이 조금 난폭했는지는 모르지만 문을 열고 뛰쳐나오다니!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그녀가 아닌가. 그녀가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을 줄 몰랐고,… Continue reading 환상의 배신

존재의 아름다움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독일 내 전염병 감염자 수와 그에 대응하려는 독일 정부의 규율이 라디오 주파수를 통해 우리 집 주방까지 처들어와서는 눈치 없이 떠들던 4월이었다. 앞으로 이 시기를 그렇게 기억할 것 같다. 어느 대도시에서 하룻밤 새 수천이 죽었고, 감염되지 않으려면 마스크를 해야 하니 마니, 불길한 말을 주고받는 게 이성적인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그런 뉴스를 듣고 있으면… Continue reading 존재의 아름다움

말, 글, 춤

어떤 마음은 떠오르는 즉시 근처에 있는 단어로 문장을 만든다 해도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 그런 마음은 애석하게도 말로 설명하려고 할수록 멀어졌다.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허무히 사그라드는 불빛처럼,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며 원망하기도 했다. 한동안 괴상한 침묵을 버티며 언젠가는 그 마음이 글로 표현되기를 기다렸다. 사실은 말도 글도, 입술과 손가락을 벗어나면 다 자유로운 것인데! 그걸… Continue reading 말, 글, 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