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여름, 장보러 가는 길에 김강과 나 . 전염병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자연스럽게 설명하기 어려운 한 해였다. 이전처럼 우연을 기대하며 미지근하게 살다가는 코로나에 감염되기 전에 어쩌면 미라가 되어 발견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만나려면 연락을 먼저 하거나 연락이 와야 했다. 그래서 결국 만나면 어색한 몇 미터 거리를 두고 상투적인 안부를 주고받았다. 친구가 최근 누구와… Continue reading 2020년과 2021년 사이
Author: Jueun Lee
X의 정체
이번 학기에 청강하는 과목들은 전반적으로 정체성(Identität)에 관한 세미나가 많은데, 강의명만 나열해봐도 이렇다. 정체성과 건축(Identität und Architektur), 정체화와 정체성(Identifikation und Identität), 젠더와 다양성(Gender und Diversity). 마치 이 혹독한 겨울학기가 지나고 비로소 봄이 오면 '그래서 자네는 정체성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는 똑 소리 나게 대답할 줄 아는 대학생이어야 할 것만 같다.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와중에도 다들 처음에는… Continue reading X의 정체
줄넘기
2018년 봄 나는 우리의 연애가 단체 줄넘기와 닮았다고 종종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의 몸이 달라서, 다른 세대라서, 다른 전공에 몰두하고 있어서, 다른 목소리를 내서, 다른 영혼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이유로 물러선 만큼 길어진 줄넘기와 텅 빈 운동장이 자꾸만 떠오른다. 한산한 운동장에 널찍하게 서서 붕붕 돌리기 시작한 단체 줄넘기. 그 사이로 고양이 두 마리가 유연하게 넘나들기도, 예쁜… Continue reading 줄넘기
1-5번 무한루프 속에서
지난주 일요일 밤에는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다가, 한 남성이 홀로 "자유(Freiheit)"를 애타게 외치는 모습을 보았다. 그에게는 자유가 마치 잃어버린 강아지 같은 것인 듯, 골목 하나하나 포기하지 않고 목이 쉬도록 불러제꼈다. 게다가 그의 손에는 기다란 각목이 야무지게 들려 있었는데, 그 투박한 나무토막 끝에 기름불이 아슬아슬 사선으로 일렁이는 게, 정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처량하고 또 그래서 위험해… Continue reading 1-5번 무한루프 속에서
고쳐쓰기를 여러번
요즘 들어 집중하기가 어렵다.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작 써야 하는 글의 초점은 날아가고 어느새 다른 공상에 빠져있다. 어차피 판타지라면 조금 더 자유로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내 좁은 머리통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에 이제껏 살아온 맥락을 크게 벗어나기는 어렵다. 한참을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더럽게 재미없는 것 같다 결론 내고 생각하기를 중단했다. 나로부터 태어난 것을 부정하고 싶은 건 무슨 심보이며… Continue reading 고쳐쓰기를 여러번
진공청소기와 거미집
화병을 잃어버린 이후로는 집에 생화를 두고 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게 작년이었나. 이 블로그에 '화병의 꽃이 시들고 줄기가 썩어가는 섭리를 지켜보는 게 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라던가 하는 적당한 글을 썼던 것 같은데 사실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보다 이번에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거미가 계속 눈에 걸렸다. 화병이 있던 화장실 천장에는 초대형 거미가 종종 진을 쳤는데… Continue reading 진공청소기와 거미집
프라우 리 (Frau Lee)
독일어를 배우느라 저질렀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나열해 보라고 하면 나는 밤도 지새울 수 있을 것만 같다. 지금의 허접한 독일어 실력을 갈고닦는 데 나 역시 무수한 오해와 오독을 거쳐왔기 때문이다. 글자 자체의 의미에 집중하니 상황을 오버해서 받아들이거나 - 반대로 가볍게 이해하여 뒤늦게 수습한다고 난처했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수많은 시행착오 중에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웃픈 에피소드를 하나 골라야… Continue reading 프라우 리 (Frau Lee)
그녀의 근황
냉장고 한쪽에 아기 고양이용 우유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거 깻잎이가 먹던 건데 어떡하지? 하고 몇 번이나 우리 손에 들렸다가, 다시 냉장고로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우유 팩. 그걸 마시던 깻잎이가 떠나고 두 달이 지났다. 깻잎이가 숨쉬기를 멈추고 나서도 우리는 한동안 깻잎이의 빈 껍데기에 대고 이름을 불렀는데 근육이 굳어도 털은 윤기가 반지르르하게 흘러서 자꾸자꾸 손이… Continue reading 그녀의 근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