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의 정체

이번 학기에 청강하는 과목들은 전반적으로 정체성(Identität)에 관한 세미나가 많은데, 강의명만 나열해봐도 이렇다. 정체성과 건축(Identität und Architektur), 정체화와 정체성(Identifikation und Identität), 젠더와 다양성(Gender und Diversity). 마치 이 혹독한 겨울학기가 지나고 비로소 봄이 오면 ‘그래서 자네는 정체성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는 똑 소리 나게 대답할 줄 아는 대학생이어야 할 것만 같다.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와중에도 다들 처음에는 대단한 열의를 보였다. 스크린 너머로 흥미로운 질문들이 오갔다. 특히 한 세미나의 첫날에는 ‘당신을 가리키는 대명사는 무엇인가? 그녀, 그, 혹은 무엇?’ 이란 질문에 대한 대답을 5분간 고민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니 강사가 알파벳 순으로 학생들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차분하게 한 명씩 그에 대한 대답을 짧게 하고, 이어서 바로 자기소개를 했다. 한 명을 제외하면 백인 여학생이 주류로 보였고 그들은 대부분 ‘그녀(sie)’ 라고 대답했다. 나는 독일에서 꽤 오래 살았지만, 그래도 한국어 모국어 화자로서 인칭대명사로 불리는 건 아무래도 익숙하질 않아서 ‘이름’이라고 대답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강사가 전혀 다른 단어여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차례가 J로 넘어왔다.

“요우…유어인? 미안해요. 어떻게 발음하죠?”

나는 내게 걸린 음 소거를 해제했다.

“준이에요.”

“오케이, 준.”

강사가 고개를 숙여 메모했다. 아마도 내 이름 옆에 무언가를 썼을 것이다. 나는 이제는 그런 상황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화면에 정수리가 나오는 동안 나는 나름대로 준비한 말을 했다.

“제 대답은 ‘이름’입니다. 건축을 공부하고 있어요.”

그 이후 다른 학생들이 한결같이 ‘그녀’라고 대답하는 동안 나는 왠지 집중하는 게 어려웠다. 생각해보니 대명사란, 사물의 이름을 대신하는 지시대명사나 인칭대명사를 일컫는 말인데 나는 뚱딴지같이 이름이라고 답했으니 애초에 맞지 않는 말을 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뾰족하게 다른 단어를 떠올리기도 어려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수업에서 소개되는 참고자료들이 재밌어서 또 금방 페이스를 찾았다. 하루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헤테로 섹슈얼 매트릭스(Heterosexuelle Matrix)를 설명하는 5분짜리 비디오를 보고 30분 동안 토론을 했다. 다른 수업에서는 나이 지긋한 교수님이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의 <검은피부 하얀가면(Schwarze Haut, weiße Masken)>을 (체감상) 40분가량 (도저히 따라가기 어려운 속도로 이런저런 유명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소개하셨는데, 아무도 중간에 끼어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교수님은 책 무덤 같은 자신의 서재에서 담배를 피우며 하얀 연기를 카메라에 뿜고 있었다. 스크린에 학생들의 카메라가 하나씩 꺼질 때마다 나는 왠지 모를 오기가 생겨 이 책을 언젠가는 읽어보겠노라고 대학노트에 큼지막하게 낙서를 했다.

어떤 수업에서는 아무도 나를 호명하지 않았는데 나는 음 소거를 해제했다. 그리고 “이 주제는 너무 개인적(persönlich)으로 느껴져서 토론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요.”하고 말했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했다. 그때껏 그다지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하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돌발발언에 당혹스러워하는 선생님의 얼굴을 보며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나는 나대로 그 말을 해야 했다. 자유분방한 세미나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나는 토론 주제와 관련된 지나치게 개인적인 기억과 감상에 함몰되지 않으려 나름대로 몸부림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체성이 주제인 세미나에 참여했거나, 사진 속 같은 퀴어 퍼레이드를 목격한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X에게 문자를 한 통 남기고 침대에 들어간다. 오늘 뭘 보고 널 생각했는지 주절주절 말하지 못한다. 대신 잘 지내고 있는지. 한국도 상당히 추워졌을 텐데 감기에 걸리진 않았는지 두루뭉술한 문자밖에 하지 못한다. 이주한 이후로는 늘 곁에서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하는 죄책감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이렇게까지 마음이 아픈 건 나에게 X가 아주아주 오래된 단짝이라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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