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도망치던 거 생각나

Untitled (8)

책장을 정리하다가 윤장섭 교수님의 <한국 건축사>를 발견했다. 대전대학교 다닐 적에 전공책이었는데 나에겐 그 시절을 대표하는 물건이라 독일에 넘어온 후에도 여러 번 이사했지만 늘 가지고 다녔다. 바래진 표지를 보고 있으니 십 년 전의 향수가 밀려와서 어느새 나는 선 채로 책을 펼쳐보고 있었다. 수업 중에 받아쓴 필기는 딱 1학기 분량만큼 의욕이 넘쳤다. 장을 넘길수록 흐지부지하더니 나중에는 읽는 것도 지겹다는 듯 성의 없는 밑줄만 잔뜩 쳐 놓았다. 뭐, 그때는 그런 게 보통이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정갈한 목차에 안심하고 책을 덮으려는 찰나, 페이지 귀퉁이에 누군가가 펜으로 휘갈겨 쓴 문장이 눈에 띄었다. 은밀하게 속삭이는 듯한 얇은 필체였다. 아까 도망치던 거 생각나, 라고 사선으로 흘려져 있었다. 한참 그 글씨체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나서야 그걸 쓴 장본인이 10년 전의 나라는 걸 인정할 수 있었다. 그 외의 단서가 될 만한 것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시절 나는 누구와 필담을 나눈 것일까? 아마도 2011년도 대전 동구 용운동의 붉은 벽돌이 멋진 건축 동에서.

옆자리에 앉아 피식 웃었을 것만 같은 이의 얼굴도 이름도 이제는 흐릿하다. 무엇으로부터 우리가 도망쳤던 건지. 너는 누구였는지. 어쩌면 내가 지난 십 년간 몰두한 모든 도전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이 필담을 잊으려 도망쳤던 게 아니었는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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