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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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아는 사람은 아는 이야기로 나는 작년 5월, 갑작스러운 공황장애 발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정신질환에 별다른 편견이 없어서 그런지 다행히 치료가 빨랐다. 지금은 많이 나아져서 약물도 상담도 0에 천천히 수렴한다. 공황장애는 반드시 정신과의 약물치료와 상담 치료(인지행동치료)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앞으로 삶이 또 버거워지면 주저 없이 또 진료실에 방문할 것이다.

상담실에서, 진료실에서 눈물을 쏟았던 지난한 시간이 지나고 – 전문상담사와 전문의의 지도에 따라 온순한 양처럼 살았던 덕분에 몇 가지 좋은 것들을 배웠다. 좋은 것은 나누면 좋은 거니까, 또 좋은 것은 금방 잊히기도 하니 글로 적어보려 한다.

눈에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충돌이 일어났을 때,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이미 팔다리는 부러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통증은 나만 알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상의 요구는, 자비도 없이 매일매일 넘쳐났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애썼지만 결국- 출석, 신청, 약속, 취소 같은 기본적인 수행능력이 완전히 떨어졌고 나중에는 억지로 몸을 상황에 구겨 넣으려고 하면 공황발작이 심하게 왔다.

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 친구, 동료, 튜터, 교수님에게 병을 알리고 치료를 열심히 받고 있다고 솔직히 말했다. 내 사정 따위 이해해주지 않는 사람도 물론 있었지만 대개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거나, 살았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이해받고 응원받을 수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덕분에 건강을 되찾았을 때, 느슨해진 신뢰를 복구하려고 자연스레 노력하게 되는데 신기했다. 이게 상담 선생님이 말했던 ‘사회로의 복귀’과정이구나 싶기도 하고.

치료과정에서 흥미로웠던 건 근본적인 내면의 문제라던지, 외부적 갈등을 바꾸거나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가 치료방식이었다. 사람은 다 다르니까 어떤 사람에겐 적절한 방법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주 효과적이었다.

인지행동치료사와 함께 의논하면서 행동을 아주 조금씩 바꾸는 일이 우선시 되었다. 나의 생각 회로는 흑백논리 (A가 아니면 B일 거야)에 길들어 있었다. 행동 치료의 목표는 심플하게 이야기하면, ‘일상 속에서 유연하게 아주 작은 대안을 찾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대안은 물론 욕구를 충분히 해소하는 방향이면 좋겠지만 적절히 선택적 포기를 하거나, 부정적 감정을 인정하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도 해당하였다.

물론 이 모든 노력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는 조건 속에서 가능하다. 몸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온몸의 근육을 이완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공황발작이 올 정도로 뇌의 청반핵이 고장이 난 거면 혼자 의지만으로는 어렵고, ‘친밀한 사람의 열렬한 응원’과 ‘약물치료’가 몸의 회복에 정말 도움이 많이 된다.

치유의 시간은 지났다. 일상으로 복귀하면서 나는 나름대로의 원칙을 정했다.

불안을 조절하고 일상의 긴장을 적절히 즐기기 위함이다.

첫 번째는 ‘자주 심호흡 하기’이다. 도시에서 바글바글하게 살다 보니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는데, 인지행동 치료에서 배운 호흡법은 도움이 많이 됐다. 높아졌던 긴장이 천천히 내려오고 편안해질 때까지 호흡에 집중한다. 호흡은 나를 돌보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는 ‘운동하기’이다. 자전거를 땀이 많이 날 정도로 타면 시원해진다. 복잡했던 생각도 정리가 되고 마음도 상쾌해진다. 최근 유도를 시작했는데 평소 자전거를 많이 타기 때문인지 2시간 수업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유도를 통해 내면의 분노를 긍정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보다 덩치가 큰 남자를 기술로 매쳤다! 나보다 힘이 센 남자를 바닥에 찍어눌러 놓아주지 않는 경험은 정말 재미있었다. 하얀 도복을 입는 경험도 즐거웠고.

세 번째는 ‘멀티테스킹하지 않기’이다. 동시에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무언가를 하지 않을 때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지 않는다. 정말 불가피한 일을 제외하고는 계획적으로 멀티테스킹을 지양할 수 있었다.

네 번째는 ‘주말은 취미생활과 쉼으로 채우기’이다. 아프기 전에는 하루 종일 설계 생각밖에 못 하고, 그러다보니 너무 예민해져서 곡기를 끊고 사람이 시들시들해지는 패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월-금, 그것도 학교의 수업 시간, 공강 시간에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나머지 시간엔 쉰다.

그러니까 나의 생산활동은 이제 명확하게 구분된다. 평일 오전 10시-오후 6시. 이 여덟시간을 제외한 시간엔 공부하지 않는다. ‘부족한 거 아닐까?’ 에서 ‘오늘은 이걸로 충분하다!’로 마음이 넘어올 때까지는 당연히 시간이 걸렸지만. ㅎㅎ

그러다 보니 요즘 주말이 편안해졌다. 보통 적게 읽고 많이 쓰는 것 같다. 읽을 때는 세상의 넓음을 배워서 좋고 쓸 때는 표현의 자유로움을 느껴서 좋다. 세상엔 멋진 글을 쓰는 사람이 많고- 많았다는 것에 감사한다.

다섯 번째는 ‘그날의 피로는 그날 풀기’, ‘그날 안 풀렸으면 다음날 풀기’이다. 몸의 피로를 절대 정신적으로 부담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미 몸은 지쳤는데 눈을 새파랗게 뜨고 버티지 않는다. 피로는 깊은 수면과 따끈한 물로 용해가 되는 성질이다. 피곤하면 잔다. 피곤하면 족욕을 하거나 천천히 목욕 한다. 피곤하면 “나 피곤하다.”하고 말이라도 한다.

어떤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배웠을 수도 있겠지만. 뭐 어때? 나에겐 요즘 이 다섯 가지를 배운 게 가장 큰 자랑거리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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