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행기 (1) 미세먼지 주의보와 안양 아파트촌

헬싱키 공항을 경유하여 인천으로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출국 심사를 하려고 늘어진 줄에 어떤 조그마한 동양인 여학생이 유독 눈에 띄었다. 커다란 캐리어를 운반 수레에 쌓아 놓고는 초조한 눈으로 심사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총머리를 한 그녀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리고 총명해 보였다. 나 역시 저렇게 홀로 독일행 비행기를 탔었는데… 벌써 그것이 5년 전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독일 땅에서 고군분투한 지난한 순간들이 떠올라 아찔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심사대를 통과했다. 곧 게이트가 열린다는 안내 문구가 면세점 위 모니터에 띄워진 것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핀에어의 AY41기로 갈아타서 열 네시간을 동쪽으로 날아가야 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 펼쳐진 활주로에서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이 보였다.

기내식을 먹기 전에는 피곤이 쏟아져 금방이라도 곯아떨어질 줄 알았는데, 맥주 한 캔에 정신이 맑아졌다. 이코노미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정수리 아래로 터치스크린이 번쩍거렸다. 다들 지난해에 흥행했던 영화를 켜두고는 플라스틱 포크로 핀란드식 미트볼을 끄적거렸다. 승객의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었다. 뒷좌석의 중년 그룹이 이런저런 유럽 여행담을 나누었다. 인천공항에서 휴대폰의 비행기 모드를 풀었을 때 나는 한국에 도착한 것을 실감했다. 독일 통신사의 로밍 안내와 함께 초미세먼지 경보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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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고 첫 일 주일은 시차 적응에 실패했다. 밤새워 뒤척이다 동이 트면 숙소를 나와 아침 산책을 나섰다. 미세먼지가 심해, 마치 안개가 낀 것 같은 아파트촌을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대부분 90년대에 지어진 복도식 아파트가 단지별로 질서정연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퉁이에 계단실이 규칙적으로 돌출되어 있는 것이 제법 조형적이다. 가장자리를 둥글게 깎은 신라아파트, 배란다에 볼륨을 불어넣은 샛별아파트, 지그재그로 조각된 부림아파트까지 개성 있는 입면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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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 바래면 주기적으로 덧칠을 하는 아파트 레터링도 멋이 있다. ‘래미안’이나 ‘자이’처럼 번쩍번쩍한 이름은 아니지만 ‘신라’, ‘부림’이 ‘아파트’와 붙어 ‘신라아파트’, ‘부림아파트’가 되는 한국어의 쫄깃함은 외국인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파트 사이사이 놀이터가 있고 나무를 심어놨지만, 풍경이 인공적으로 복제된 것 같아 왠지 모르게 삭막했다. 세월의 때가 뿌옇게 낀 베란다 창문에 에어컨 실외기와 잡다한 상자들, 널어놓은 빨래가 뒤섞여있어 어떤 취향의 사람들이 사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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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면 고양이 두 마리가 더 있다. 완벽한 카모플라쥬! 주변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가방에 가지고 다니던 고양이용 참치캔을 따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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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욱신욱신하게 열이 올라서 괴로웠다. 입속이 건조하여 물을 자주 마셨지만, 혀가 젖지는 않았다. 손발에 땀이 나고 온몸에 염증이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나중엔 마음이 괴로운 것인지 몸이 괴로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점심 즈음에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아빠가 한걸음에 달려와 누르는 초인종 소리에 잠에서 깼다. 갑자기 벌떡 일어났더니 두통이 심했다. 함께 번화가에 나가 생태탕을 먹고, 아빠는 서점에 들른다 하여 나는 숙소로 혼자 돌아왔다. 햇볕이 좋아 공원에서 벤치에 잠시 앉았다. 뱃속에서 생태탕과 이부프로펜이 잘 소화되기를 바라면서. 옆 벤치에 보랏빛 패딩을 입은 할머니가 앉아 계셨는데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셨다. 공원의 나무들이 봄을 맞아 가지에 조그마한 싹을 움트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아직 사람들의 옷차림은 두꺼웠다. 저 멀리 산책로에서 한 할머니가 느린 속도로 발을 끌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가 앉아있는 낡은 벤치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게 지금 벗겨진 거에요, 아님 뭐가 묻은 거야?”

“아이, 그냥 페인트 벗겨진 거에요. 깨끗해요.”

먼저 앉아있던 보랏빛 패딩 할머니가 말을 받아주었다. 그 할머니는 앓는 소리를 내며 벤치 모서리에 주저앉았다.

“어휴 큰일 났네. 조금만 걸어도 이렇게 힘들어. 갈 길이 먼데… 이렇게 힘이 드니” 

나는 햇빛에 어깨를 녹였다. 베를린에서 이 정도 좋은 볕이 있으면 너나 할 것 없이 잔디에 누워 맥주를 마실 텐데. 옆에 자전거를 눕혀놓고. 안양공원에는 노인들만이 볕을 쬐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스크를 끼고 종종걸음으로 공원을 지나쳤다. 어디선가 비슷한 헤어스타일과 똑같은 검은색 슬랙스를 입은 남자아이 둘이 튀어나오더니, 바지에 손을 찔러 넣고는 공원 입구에서 서성였다.

“지금 이새끼 엘리베이터 탔대.”

“그 새끼 똥싸고 있을수도 있어”

하는 소리가 건들거렸다. 맞은 편 벤치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먼저 앉아있던 패딩 할머니와 갈길이 먼 할머니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저기, 신라아파트 6동 사시죠?”

보이는 연세보다 목소리가 훨씬 젊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어?”

“제가 5동 살아요.”

“어… 그렇구먼”

“그 일층, 엘리베이터 옆에 사시죠? 앞에서 한 번 봤었는데.”

“그랬었나?”

“내가 옷을 뒤집어 입었었잖아. 그 때 보고 알려줬었는데. 기억 안나요? 나 옷 뒤집어 입은거 아니냐구”

“아아 기억나지. 그 사람이구만”

열기운 때문인지, 신라아파트 5동 할머니와 6동 할머니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엿듣는 것이 재미있었다. 한참을 뺨이 발그레해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그러다 행인들의 마스크를 보고 있자니 덩달아 목구멍이 따가운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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