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푸집

  이천십칠년 유월의 폴더에서 찾은 이 사진은 여름의 초입이라고 믿기 어려운 스산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다. 이 사진은 베를린 바샤우어슈트라세 역(S Bahnhof Warschauerstraße)에서 나오면 보이는 풍경으로, 바람길을 따라 다리 밑으로 광활하게 철로가 놓여있는 곳이다. 세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다 아래로 눈길이 떨어지면 승강장으로 지하철이 들어온다. 바샤우어 다리(Warschauer Brücke)위에는 역에서 쏟아지는 바쁜 발걸음과 그들에게 약을 팔려는 은밀한 이들이 섞여… Continue reading 거푸집

각자의 사정

  두 사람이 동시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난 3년을 동고동락하며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 내뱉은 "우리는 결국 다른 사람이야. 내가 너를 백 퍼센트 이해할 수는 없는 거야."라는 말이 야속해서 다른 한 사람은 눈물을 흘렸다.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각자 속으로는 복수의 칼날을 세우며, 다음 말을 고민했다. 하얗게 질린 입술이 얄밉게 움찔거린다. 그 두… Continue reading 각자의 사정

주방 한 쪽의 소파

  지난가을 소소한 결심을 하나 했다. 주방의 한 벽면을 독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신발장을 치우고 그 자리에 소파를 놓기로 한 것이다. 신발장은 본래 화분 등을 올려놓는 선반이었으나 우리 집에서는 무심하게 신발의 무덤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 위에 올려지는 신발은 반드시 계절 잠을 자야 했다. 신발이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자리에는 고양이조차 별 관심이 없었다. 인간의 털, 고양이의 털들이… Continue reading 주방 한 쪽의 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