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미, 칠월의 솔 _ 김연수 (문학동네)

꿀 같은 여름방학을 앞두고 가장 먼저 작성한 ‘하고 싶은 일 목록’의 첫번째 항목은 ‘한국 소설 많이 읽기’였다. 지난 학기에 워낙 독일어로 고통 받았기 때문에 한국어로 쓰여진 유려한 문장을 음미하고자 하는 갈망이 샘솟았다. 독일어 서적은 질 좋은 책들이 많지만 어렵다. 외국인이기에 아주 느린 속도로 모르는 단어를 찾아가며 책을 읽어야 해서 들이는 시간에 비해 읽는 양이 많지 않고, 읽고자 했던 글을 다 읽고 나면 진이 빠져 정작 내용에 대한 깊은 사유는 하기 어려웠다. (이 부분은 앞으로 공부할 수록 나아질거라 희망한다..!) 하지만 그 덕분에 상대적으로 한국어로 된 글은 술술 문장을 흡입하며, 이야기의 흐름에 즉각즉각 반응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문학에서 독서의 기쁨을 크게 느끼게 된 것은 유학생활에서의 또 다른 작은 성취라 할 수 있겠다.

김연수 작가의 이름은 먼저 읽었던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 단편집의 추천사에서 처음 보았다. 젊은 신인작가를 응원하는 글귀가 다정하고 멋져서 인상에 남았었는데, 이후에 지인으로부터 김연수 작가의 작품을 추천받아 읽어보기로 했다. 원래는 한국문화원에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빌리고 싶었으나, 누가 훔쳐갔는지 서가에 없었고 대신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을 빌렸다. 총 11편이 실린 단편소설집이다.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의 노소설가는 컴퓨터로 글을 쓰는 젊은 작가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초고를 잃어버리는 ‘미친짓’이라고. 이 고집이 센 노인의 글쓰기 방식은 먼저 검은색 볼펜으로 초고를 쓴 뒤, 빨간색 볼펜으로는 그 이후에 미처 쓰지 못한 글을 덧붙이고 고쳐쓰는 것이다. 하지만 붉은 볼펜으로 문장에 살을 붙여도 경험의 생생한 감각에는 도달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

아무리 잘 쓴 문장도 실제의 경험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작가의 고통이란 이 양자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했다. 빨간색 볼펜을 손에 들고 괴로워 하던 나는 그 고통이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경험의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괴로운 것이다. –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 173 쪽

이 위의 구절이 며칠 동안 마음에 여운이 남았다. 나에게도 그 즉시 사진이나 일기로 기록해 놓지 않으면 순간의 생생함이 금방 사라져 버렸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 마다 어쩌면 더 나은 글을 기록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일기나 에세이를 쓴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꾸준히 다이어리로 일정을 관리하는 것과는 다른 감각의 기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은 읽는 내내 김연수 작가의 능수능란한 이야기 전개방식에 즐거이 마음을 맡기고 읽어내릴 수 있었다. 문장이 덤덤하고 아름다워서 이후에 몇 번 다시 읽게 될 것 같다. 다른 분들의 평을 보니 이미 미문으로 유명한 소설이었다. 특히 주인공인 파멜라 이모는 이 단편 소설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인물이다. ‘차정신’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파멜라 차’로 미국에서 오랜 생활을 한 이 이모님은, 나에게 베를린에서 만났었던 몇몇 파독 간호사분들을 떠올리게 했다. 자기 욕망에 충실하고, 다른 세계로 두 팔 벌려 뛰어가는 용기있는 여성! 그 강인함은 언제나 멋진 전율을 준다. 

파멜라 이모는 남편의 죽음 이후에 플로리다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도로 돌아왔다. 아무 연고가 없는 서귀포에 집을 구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음을 화자인 ‘나’는 서서히 알게 된다. ‘나’는 파멜라 이모의 조카인데 이 설정 구도도 좋았다. 초기 연애감정의 뜨거움에 몸을 내던지는 것이 ‘나’와 파멜라 이모의 닮은 구석인데, 화자가 여성이었다면 전혀 다른 주제의 소설이 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작가는 ‘나’를 30대 유부남으로 두었다. 그의 자신보다 연장자인 여성의 삶을 이해하고 관찰하는 감각이 부드럽고 세련되게 느껴졌다. 

그가 가리키는 사진 속에는 단발머리를 하고 주먹을 쥔 두 손을 양옆으로 펼친 채 카메라를 향해 돌진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한, 이십대 초반 이모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다음 사진에서는 앉은뱅이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서 고개를 돌리고 카메라를 쳐다봤다. 사진 속의 이모는 놀라울 정도로 젊었고, 또 아무런 두려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파멜라 차로 변신하기 이전, 차정신으로 살아가던 시절의 얼굴들.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팔베게를 베고 가만히 누워 밤을 지새우며 빗소리를 듣던, 젊은 나날의 조각들. – <사월의 미, 칠월의 솔>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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