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서리 집들 / Straßenec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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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 급작스럽게 예술대학에 원서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1월 이였는데, 지원시기까지 시간이 촉박해서 포트폴리오를 4개월여 만에 만들어 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연습량이 많아지니 자연스레 그림이 조금 늘었다. 처음 한 달은 주제를 정하는 데 썼고, 3개월 동안은 15장의 그림을 A3 크기의 종이에 그렸다. 먼저 주제 선정을 할 때는 심오한 어떤 것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은 제쳐놓았다. 대신 명쾌하고 ‘건축적’이라고 느껴지는 선명한 감각은 잘 메모해 두었고, 그중에서도 잘 표현할 수 있는 건 어떤 걸까, 중점적으로 고민했다.

하얀 종이 앞에 서니 내가 얼마나 겁이 많은지 알 수 있었다.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물감이나 색연필을 쓰는 일은 부담스러웠다. 목탄을 쓰는 것도 큰 모험처럼 느껴졌다. 결국, 어떤 오브제로서 고운 질감이 필요했을 때, 종이에 미리 틀을 만들어 도려내었다. 그리고 그 밑에 8B를 깔아 놓고, 휴지로 살살 번지게 하니 나름 원하는 그림이 나왔다. 

낯선 도구와 방법들을 하나둘 밀어내니 펜과 연필이 남았다. 결과물이 너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고민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신 조심스럽고 아주 느리게 그리려고 노력했다. 이전에 예술대 학생이신 분이 나의 그림에서 조급함이 보인다고 하신 적이 있었다. 차분히, 최대한 많이 그려보라고 조언을 해주신 덕분에 약간 묵직한 무게중심을 잡고 작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고자, 작업하는 시간을 오후 1~5시 사이로 한정했다. 나머지 시간에는 아르바이트 하고, 책을 읽고, 탁구를 하고, 저녁엔 애인이랑 탱고를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그 시기에 나는 개인적인 계기로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에 취해 내가 포트폴리오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죄책감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가난에 대한 걱정과 무기력 또한 잦아들었다. 나에겐 작지만 뜨겁고 아름다운 몸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날들이었다. 이 시기를 통과하고 나서도 불안은 이따금 찾아왔지만, 혼란에 깊게 빠지진 않았다.

대부분의 유학생은 학교 들어가서 눈물 쏙 뺄 정도로 힘들다고 한다. 아마 나도 한 달 후엔 더 핼쑥해져서 좀비처럼 돌아다닐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 자신의 감정이나 서사에 빠질 여유가 없어질 거라 생각하니 즐겁다. 좋은 주제를 만나면 나도 건축 오덕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기도 한다.”

–  2016년 9월에 페이스북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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